춘추필법과 태백일사에 다르게 기록된 고연수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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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 컬럼니스트 2019-06-04

 

한편 고구리 진영에서는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로 벼슬의 고정의가 고연수에게 당태종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서 없애고, 밖으로는 융적들을 굴복시켜 혼자 힘으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다스리라는 천명을 받은 인재이다. 그런 그가 사방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대적할 수 없다. 유일한 계책은 병사를 정돈해 싸우지 않고 지구전을 펴다가,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고연수는 지구전으로 군량수송로 차단작전으로 나가라는 고정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 40리 밖까지 나아갔다. 당태종은 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고연수를 유인하라고 명령했다. 첫 교전에서 당나라 군사들이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 하자 고연수는 기세를 타고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해 진을 쳤다. 당 태종은 장손무기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고지에 올라 산천의 형세 중 군사를 숨길 수 있는 곳과 병력의 출입이 가능한 곳을 정찰했다. 그러다가 고구리·말갈 연합군의 40리에 달하는 진영을 보고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때 이도종이 고구리가 전력으로 여기를 방어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평양성의 수비가 허약할 겁니다. 제게 5천 정예병을 주시면 달려가 저들의 본거지를 뒤집어버리겠습니다. 그리하면 싸우지 않고도 수십만 군사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했다. 이에 장손문기는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출정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는 작전은 불가하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적도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우리는 완전 포위당하는 격이 된다. 그러니 안시성을 먼저 공격한 다음 건안성을 취하고 그런 연후에 평양성으로 진격해야 안전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1) 춘추필법으로 기록된 고연수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나는 귀국의 힘 센 신하가 왕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된 것은 내 본심이 아니다. 귀국의 경내에 들어와 몇 개의 성을 빼앗기는 했으나, 귀국에서 신하된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을 돌려주겠노라.”라고 말하니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더는 방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당태종은 이세적에게 15,000명의 보·기병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처남인 장손무기에게는 11,000명의 정예군을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배후를 공격하게 했다. 당태종은 직접 4,000명의 보·기병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고, 모든 부대에게 북과 나팔소리가 나면 일제히 맹공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 고구려 15만대군을 1/3 병력으로 궤멸시켰다는 춘추필법     © 편집부

 

또한 항복받을 군막을 조당(朝堂) 옆에 설치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상한 기록이 있다. 상대와 싸우기도 전에 상대가 항복할 것을 미리 알고 항복의식을 치를 장소를 미리 설치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전투에서 당나라가 패할 수도 있고, 설사 이겼다 하더라도 상대 장수가 전사할 수도 퇴각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밤에 유성이 고구리 진영으로 떨어졌다. 622일 아침 고연수는 이세적이 포진한 것만 보고는 병사를 동원해 공격했다.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사들이 일으킨 먼지를 보고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깃발을 들게 하니 따라 당나라의 모든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진격했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하며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려 했으나, 이미 고구리 진영은 대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때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고함을 지르며 고구리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오니 대적하던 고구리 군사들이 쓰러졌다. 이 틈을 틈타 당나라 대군이 총공격을 감행하자 고구리 군대는 큰 혼란에 빠져 2만 명의 군사들이 전사했다. 당태종은 멀리서 설인귀를 바라보더니 유격장군으로 임명했다.

 

▲ 안시성에서 가까운 설인귀 고향집에 세워진 동상     © 편집부

 

고연수 등이 남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산에 의지해 자체 수비를 견고하게 하자, 당태종은 모든 부대에게 명령해 고구리 군사들을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돌아갈 길을 차단하게 했다. 이튿날 고연수 등은 군사 36,800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당태종은 욕살 이하 지휘관 3,500명을 선발해 당나라로 옮기고 나머지는 석방해 평양성으로 돌아가게 하니 모두 두 손을 들고 절하며 환호하니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고, 말갈인 3,300명은 전부 생매장했으며 말 5만 필, 5만 두, 명광개(明光鎧) 1만 벌 등을 노획했다. 75, 당태종은 군영을 안시성의 동쪽 고개로 옮겼고, 22일 고연수과 고혜진에게 벼슬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동성에서 50만석의 양곡을 노획하고 안시성에서 10만 마리나 되는 가축을 노획한 당나라가 불과 3개월 후 먹을 양식이 떨어져 회군했다는 기록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고연수를 따라 항복한 36,800명 중 3만 명을 평양성으로 되돌아가게 했다는 기록 역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일어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2) <태백일사>의 고연수 기록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은 고구리와 말갈의 15만 병사를 이끌고 전진해 안시와 연결되는 험준한 산에 진지를 쌓고 병력을 종횡으로 풀어 적의 군마를 약탈하니, 당나라 군사들은 감히 접근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요택이 가로 막고 있으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안시성 40리 밖으로 나간 고연수는 고정의의 계략대로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로 하여금 보급로를 끊고 식량을 불태우거나 빼앗자 이세민은 백약이 무효였고 고구리군을 유혹하는 뇌물책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 속으로는 거슬렀다. 게다가 수시로 습격을 감행해 당나라 군대를 마구 무너뜨리니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 영화 안시성에서 전투를 지켜보는 당태종     © 편집부


 어느 날 고연수 등이 야간에 기습작전을 감행해 번개같이 치니 이세민이 거의 포위될 지경에 이르렀다. 두려운 빛이 얼굴에 역역했던 이세민은 고연수에게 사자를 보내 재물과 보화로 달래며 나는 귀국의 힘 쎈 신하(연개소문)가 임금을 시해했다기에 그 죄를 물으러 온 것뿐이다. 귀국에 들어와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받을 수 없어 몇 곳에서 노략질을 했을 뿐이니, 귀국이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가겠노라.’라고 통사정했다.

 

고연수는 좋다. 당나라 군사가 30리 물러난다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를 알현하겠노라. 그러나 막리지는 아국의 기둥이고 군법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 없다. 너희 임금 이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제수를 취했으니 죄를 물을만하다. 그대로 전하거라.’라고 말하고는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방비에 힘썼다.

  

산을 의지해 진지를 굳히고 적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니 이세민이 온갖 꾀를 다 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요동 출병의 불리함을 통탄할 뿐 후회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육군(六軍)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조차도 보이질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기(고구려기)로 에워싸였다고 보고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 해도 위험은 이와 같았다.’라고 했으니 <·구당서><자치통감>에서 이를 적지 않음은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는 처사가 아니겠는가?”고 기록되어 있다.

 

위와 같은 <삼국사기><태백일사>의 상반되는 두 기록 중 <태백일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15만 고구려 군대가 주필산 전투에서 당군의 일격에 궤멸되어 두 장수가 항복했다면 아마 이 전쟁은 당태종 이세민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불과 두 달 뒤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도망친 것을 보면 중국사서의 기록은 그야말로 자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으로 완전 허구로 보인다.

 

 

기사입력 :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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