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연의 멸망을 재촉한 호태왕의 407년 공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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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 컬럼니스트 2019-05-14

 

호태왕비문 14년 왜구의 대방 침략기사 다음에 이어지는 아래 17(407) 정미년 기사는 앞부분에 있는 10년 왜 관련기사처럼 많은 글자가 깨어져있다. 과연 이 문구에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었기에 이토록 많이 깨어져버린 것일까? 그리고 이 글자들을 없앰으로써 역사왜곡을 시도한 자들은 과연 어느 종족들일까?

 

(비문)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直至合戰斬⭍⭍盡所獲鎧鉀一萬餘 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城婁城□□□□□□□□□□州城(旋還)

 

 

중국인 학자 왕건군은 고구리가 백제를 공격한 것으로 해석했고, 영희조봉과 김육불김택영조소앙김덕중 등은 앞부분 들을 盡倭寇官兵追過平穰으로 읽고, 뒷부분 들을 還住東就()淨掃倭寇師旋還로 보아 14왜구 관련기사와 같은 동일선상에 놓고 아래와 같이 판독했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김육불영희조봉김택영조소앙김덕중의 해석) “재위 17년 정미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도록 교지를 내려 왜구를 깨끗이 없애라 하였다. 관병이 뒤를 쫓아가 맞닥뜨리니 평양을 벗어나면서 곧바로 전투가 벌어져 참살하고 짓밟고 밀쳐내니 노획한 개갑만 1만여, 군사물자와 기계는 헤아릴 수 없었고 돌아오면서 사비성과 루성을 파하고 다시 돌아와 동취()성에 주둔하여 왜구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영락 10(400)에 왜가 고구리에게 거국적으로 항복해 식민지가 되었고, 14(404) 대방에 쳐들어온 왜구는 인덕 왜왕의 통제를 받지 않는 해적 떼였음이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에 의해 이미 밝혀졌다. 그런 상태에서 17(407)에 고구리가 왜구를 또 격파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게다가 왜구 섬멸 과정에서 고구리 핵심지명인 평양과 사비(沙渒)성이 언급된 것 역시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 <17년 기사를 읽어낸 학자는 이유립계와 김육불/영희조봉/김택영/조소앙 계열뿐이다>     © 편집부

 

17(407) 기사는 후연의 멸망을 재촉한 고구리 호태왕의 공격전쟁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글자들을 없앰으로써 역사왜곡을 추진한 장본인은 바로 중국인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여기에서도 이유립 선생의 해석을 인용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가장 잘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적색은 깨진 글자, 청색은 희미한 글자)

 

 

(복원된 비문)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往討宿軍城以太師直至合戰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城樓城爲郡縣降禿髮因襲取凉州城.

 

(해석) “17년 정미년(407)에 보기병 5만을 파견해 (연의) 숙군성으로 가서 토벌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처음에는() 포위만 하고 있다가 이어 군사가 바로 도착하여 맞싸워 베어죽이고 모두 소탕하니 노획물이 개갑 1만여 벌이요 군수물자와 기계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돌아오면서 사구성과 루성을 격파해 군현으로 삼았으며 독발선비의 항복을 받고 이어 량주성을 기습 공격해 빼앗았다.”

 

위 비문의 내용은 <고구리사초략>“17(407) 정미 2, 붕련과 해성에게 명하여 5만병을 이끌고 나가 모용희를 정벌하게 했더니, 장무(章武)의 서쪽에서 싸워 모조리 죽여서 쓸어내고, 개갑 만 벌을 노획했으며, 군수물자 및 무기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구 등 여섯 성을 빼앗았다.” 라고 거의 같게 기록되어 있다. 장무는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에 속한 발해군에 속한 현이다. 장무의 서쪽이라 함은 바로 하남성산서성하북성이 만나는 곳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량주성을 찾기 위해서는 량성현(凉城县)을 찾아야 한다. “后魏置北齐省故治在今河南滑县东北 (후위 때 설치한 북제의 성으로 하남성 골현 동북에 치소가 있다.) 汉雁门定襄二郡地北魏置参合县即今县治又置凉城郡领参合及旋鸿二县即今县东北之凉城也 (한의 회문정양 2개 군의 땅으로 북위 때 삼합현을 설치했는데, 량성군에서 삼합현과 선홍 2현을 다스렸다. 즉 지금 현의 동북쪽에 량성이 있다.)” 이 두 곳은 같은 지역으로 골현은 하남성 학벽(鶴壁)시와 복양(濮陽)시 사이에 있으며, 안양시 남쪽에 있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비문에 언급되어 있는 사구(沙溝)성은 과연 어디일까? 사구성은 사구수가 흐르는 성일 것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사구수(沙沟水)를 찾으면 2가지로 나타난다.

<水经注> “中川水出山茌县一源两分泉源半解北入济俗谓之沙沟水在今山东长清县南南朝宋败魏兵于此(산동성 제남시 서남쪽에 있는 장창현 남쪽)

广济河一名五丈河北宋漕运四河之一沁心支流也自河南济源县北分沁水东南流经沁阳温县又东南入黄河其在济源沁阳者即古朱沟水其至温县入河者即古沙沟水,《元史河渠志中统二年于太行山下沁口古迹置分水渠口开竣大河四道历济源河内河阳武陟五县入黄河约五百余里渠成名曰广济(하남 제원현 북쪽에서 온현에서 황하로 들어가는 강으로 패수와 비슷한 강이다.) 

 

▲ <호태왕 비문에 언급된 지명들. 17년 기사에서는 숙군성, 량주, 량성, 장무(발해) 등이 나온다>     © 편집부

               

후연(後燕)의 멸망과 동족 북연(北燕)의 성립

 

384년 모용수(慕容垂)가 세운 후연(後燕)396년 창업자가 죽자 무너지기 시작했다.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보()는 무리한 개혁을 시도하다 민심을 잃어 내부반란이 일어나 도읍을 중산에서 요서의 용성(龍城)으로 옮겼으나 결국 정변으로 인해 쫓겨났다가 살해되고 만다. 중산에서는 모용상(), 모용린()이 차례로 왕을 자칭했으나 곧 함락됐으며, ()을 지키던 모용덕()398년 남연(南燕)을 세웠다.

 

아들 모용성()이 모용보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종친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공포정치로 인해 많은 모반사건이 일어나 결국 40129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혹자는 정태후가 자신의 정부였던 모용희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저질렀다고도 한다. 조카 모용성의 뒤를 이어 모용수의 8남 모용희()19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사치를 일삼고 폭정으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된다.

 

▲  KBS 역사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의 모용보, 모용희, 모용운, 풍발                                               © 편집부


모용희는 토목공사를 남발해 국력을 낭비시켰고, 게다가 402년과 404년에 고구리 호태왕의 공격으로 많은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받게 된다. 이에 모용희는 수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무리한 작전으로 인해 희생만 컸을 뿐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결국 4072, 고구려 호태왕의 5만 대군의 보기병이 6개성을 점령하자 후연은 멸망 직전의 상태로까지 몰리게 된다.

 

모용희는 4074월에 왕후 부씨가 죽자 슬픔에 빠져 시신과 교접하기도 했으며, 전국에 명을 내려 슬퍼하지 않는 자를 조사해 엄한 벌을 주었으며,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는 공신들을 순장하려고 했다. 이에 풍발이 모용운을 추대하고는 정변을 일으켜 모용희를 처형하니 이때 희의 나이 22세였다. 이로써 북연(北燕)이 성립되고 후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구리사초략>“17(407) 4, 모용희의 처 부씨가 죽었다. 7, 운이 모용희를 죽인 후 왕이 되었으며, 풍발과 고운은 모용희를 죽이고는 찾아와 용서를 빌고 조공을 약속했다.”라는 기록과 “18(408) 무신 3, 고운이 찾아와 공물을 바쳤다. 운은 고루(高婁)의 후예였다. 얼굴이 잘 생겨 모용보와 모용희의 처 부씨에게 총애를 받았다. 부씨가 죽자 모용희가 운을 해치려하기에, 운은 풍발과 함께 모용희를 죽이고 신하되기를 청하며 찾아와 의탁했다. 상은 그가 동명의 서류이었던 까닭에 우대해주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기사입력 :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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