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하천까지 수나라 대운하로 왜곡한 중국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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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 컬럼니스트 2019-04-17

 

당태종의 침공로는 수양제와 거의 같았다. 수양제는 요택을 지나기 위해 미리 군수물자 수송용 운하인 영제거(永濟渠)와 통제거(通济渠)를 만들었다. 중국은 수·당 군대가 건넜던 요택은 현 요녕성 요하구에 펼쳐진 2백리 늪이며, 영제거는 낙양 북쪽에서 하북성을 관통해 천진까지 이르렀고, 통제거는 낙양 동쪽에서 하남성을 관통해 회하까지 이르는 대운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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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통제거는 수양제 즉위 원년(606)에 황하와 회하와 연결시키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운하이며, 영제거는 608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수양제의 1차 고구리 침공이 612년이니 그런 대운하를 4년 만에 완공할 수 있었을까? 아마 현대기술과 장비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 자연하천까지 포함한 과장된 수나라대운하     © 편집부

 

<수서 양제기>대업 원년(605)에 황하 남쪽 회수 북쪽에 사는 여러 군민 백여만 명을 동원해 통제거(通济渠)를 개착했다. 서원(西苑)에서부터 곡수와 낙수(谷洛水)를 끌어 황하에 다다르게 하고, 다시 판저(板渚)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 회수에 이르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통제거는 2단계로 나뉘어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곡낙수는 낙양과 황하를 연결하는 물길이다.   

 

판저는 하남성 사수현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수경주>수양제가 통제거를 개통했는데, 판저에서 황하를 끌어 변수로 들어간다.”는 설명이 있으며,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변수(汴水)는 낙양 동쪽 영양시 대주산에서 발원해 진유, 기현, 사수를 거쳐 주구(周口)시에서 영하와 합쳐져 회하 상류로 들어가는 현 가노하라는 설명이 있다. 즉 통제거는 황하와 자연하천인 변수를 연결하는 작은 운하였던 것이다.  

 

▲ 수나라 통제거는 황하와 변수를 연결하는 작은 물길     © 편집부

 

<수서 양제기>대업 4(608)하북 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을 동원해 영제거를 뚫어 심수의 물을 끌어다가 남쪽으로 황하에 다다르게 했다. 북쪽이 탁군과 통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하북은 지금의 하북성이 아니라 단어 그대로 황하 북쪽이며, 심수는 산서남부에서 나와 남류하다 하남성에서 급격히 동류해 황하로 들어가는 강이다.

 

이 물을 남쪽으로 끌어 황하와 연결시킨 것이 영제거이므로 요택은 하남성 제원시, 맹주시, 온현 일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중국은 영제거가 하남성 심수 동쪽에서 나와 하북 평원을 지나 북쪽으로는 북경 남쪽 탁주까지 이르는 2,000리 길이의 현 위하(衛河)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하가 자연하천임에도 포함시켜서 말이다.  

 

수양제가 영제거를 만들어 통과하려 했던 요택은 본시 거란족의 본거지였다. <요사지리지>요나라는 그전에 거란이라 불렸다. 원래 선비족의 땅인요택에 살았다.(辽国其先曰契丹本鲜卑之地居辽泽中)유관까지 1,130리이며 유주까지 714리다. 남으로 황룡이 있고 북으로 황수와 접하고, 냉형이 오른쪽에 있고 요하가 왼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황수가 하남성을 흐르는 황하의 지류이다. 따라서 요택도 하남성일 수밖에 없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소택배수: 광령 이동에서 요하까지에 있는 큰 웅덩이 소택지로 옛날에 요택이라 불렀다. ·당의 고구려 정벌 때 임시로 교량도로를 수축했다. 동쪽은 해성현에서 시작해 서쪽은 광령까지 200여리이다.”라고 하며, 광령은 하남성 수무현 서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큰 강인 심수와 황하가 만나는 그 사이는 지형적으로 늪지대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요택은 현재 황하습지라는 관광지로 남아 있다.

 

▲ 200리 요택은 현재 황하습지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편집부

 

중국은 <수서 양제기>의 인원동원 기록을 근거로 영제거를 심수에서 천진까지 이르는 대운하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영제거는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64553일 도착한 이세민이 요택을 건널 수가 없자 염립덕에게 흙다리를 만들라고 한 이틀 뒤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런 요택을 통과하기 위한 운하 건설에 백여만 명을 동원했다는 <수서>의 기록은 중국 특유의 과장임이 분명하다.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요동성을 현 요녕성 요하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 이론이다. 61213, 탁군에서 고구려 정벌 제1군이 출발해 40일 만에 출발을 끝낸 수양제는 314일 군사들이 있는 요수(遼水)에 도착했다. 부교 설치의 실패로 많은 인명이 살상된 수나라는 다시 부교를 설치하고서는 고구려 군사 1만 명을 죽이고 승기를 잡아 요동성을 포위했다.   

 

요택을 지나기 위해 만든 영제거의 남쪽에 있는 탁군에서 정벌군의 사열을 위해 2월 중순까지 머물던 수양제가 한 달 만인 3월 중순에 요수에 나타났다면, 그 요수는 절대로 현 요녕성 요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제거는 심수의 물을 남쪽으로 황하에 이르도록 한 운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수와 요택은 낙양에서 먼 거리에 있으면 수양제와 당태종의 전쟁 기록이 성립되지 않는다.

 

수양제나 당태종이 낙양부근에서 요녕성 요하까지 오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려야 한다. 요하까지 오려면 건너야할 강들이 무수히 많고 지나간 지명 역시 많아야 하거늘 사서에 기록된 낙양과 요택(요수)사이에 있는 지명이라고는 달랑 정주뿐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수·당 전쟁기록에 언급된 정주(定州)는 낙양 동쪽에 있는 정주(鄭州)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겠다.

 

천연요새 요택을 방어하지 않은 연개소문 

 

요택은 중국에서 고구리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야할 늪지대였다. 그럼에도 당시 연개소문은 이상하게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요택과 요수를 방어하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200리 진흙수렁을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한 당태종은 누가 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고 했느냐? 병법을 아는 자라면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야?”라며 연개소문의 무지함을 비웃었다.

 

그런 말을 하게 된 연유는 해상잡록(海上雜錄)당태종은 출병하기 전에 당시 당나라 제일의 명장인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정이 사양하며 임금의 은혜도 무겁거니와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태원에 있을 때 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후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의 병법에 힘입은 바 큰데, 신이 지금 와서 어찌 감히 전에 스승으로 모시던 개소문을 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당태종이 다시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누구와 견줄 만하오?”라고 물으니, 이정은 옛날 사람은 모르겠고 현재 폐하의 장수들 중엔 그의 적수가 없고, 비록 폐하의 위엄으로도 이기시기 어려울 걸로 생각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당태종이 중국의 넓은 땅과 많은 백성과 강한 병력으로 어찌 한낱 개소문 따위를 무서워한단 말이오?”라고 못마땅해 하자, 이정은 개소문은 비록 한 사람이지만 그의 재주와 지혜는 만사람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기사입력 :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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