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를 고쳐 임나일본부설을 굳힌 일본인(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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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 컬럼니스트 2019-04-03

호태왕 당시 고구리와 왜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총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호태왕비문의 을미년 기사 뒷부분에 있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到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는문구를 변조해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가야·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함으로써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냈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영락 5(395) 을미 8, 백제의 진무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상이 기병 7천을 몰아 패수 위쪽에서 8천여 급을 노획했다. 말갈이 신라의 실직을 침입했다.”라는 기록에 의해 지워진 두 글자가 曷侵(갈침)’으로 밝혀짐으로서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리에게)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을 바쳤다). (고구리가) 백잔을 격파했고, 말갈이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략했다.”라고 해석된다.

 

▲ 비만 오면 비석에서 글자를 변조한 횟물이 흘러나오는 모습     © 편집부

 

2) 6년 병신년(396)에 호태왕은 백제의 도성을 공격해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아냈으나, 아신은 왜와 밀통해 왜로 하여금 신라를 계속 공격하게 했다. 영락 10(400)에 호태왕은 보·기병 5만을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추격해 쓸어버리니 왜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만다. 그럼에도 왜가 다시 도발하자 이번에는 호태왕이 직접 친정해 왜를 격파하고는 식민지(郡國)로 삼아버렸다.

 

3) 호태왕에 의해 새로 왜왕이 된 인덕은 영락 13(403) 호태왕에게 두 딸을 후궁으로 바치는 등 온갖 성의를 다했다. 그러던 중 영락 14년에 대방에 쳐들어온 왜구는 왜의 정규군이 아니라 해적들이었음을 왜왕 인덕이 알려오자, 이에 호태왕은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고 1년간 왜의 지리에 대해 조사했다는 사실을 <고구리사초략>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세기말 일본은 위와 같은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기 위해 호태왕비문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깨버리고 탁본을 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했으나, 운초 계연수 선생이 남긴 <비문결자징실>과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궁내청에서 필사해 나온 <고구리사초략>에 의해 허구였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 비문결자징실이 수록된 대배달민족사(좌), 비문복원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 고구리사초략(우)     © 편집부

 

또한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있는 광개토경 호태황(好太皇)은 융성한 공과 거룩한 덕이 여러 임금들 중에서 월등히 뛰어나서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열제(烈帝)라 일컬었다. 나이 열여덟에 광명전에서 등극하니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군사들로 하여금 어아가(於阿歌)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행할 때 마리산(摩利山)에 이르자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이때도 천악(天樂)을 사용했다.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인들을 격파했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이보다 먼저 백제는 왜와 몰래 밀통하여 계속해서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게 했다. 이리하여 광개토경호태황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이들을 쳐서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들을 빼앗고 길을 가는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에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그 후로 백제, 신라, 가락 등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과 평량 등도 모두 평정되어 굴복되었다. 임나(任那), 이세(伊勢), 왜의 무리들이 모두 신하가 되어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함이 이때에 이르러 전성기에 달하였다.”라는 기록 역시 <비문결자징실><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위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언급된 웅진(熊津), 임천,(林天) 와산(蛙山), 괴구(槐口), 복사매(伏斯買), 우술산(雨述山), 진을례(進乙禮), 노사지(奴斯只), 속리산(俗離山) 등의 지명들이 비문에 새겨진 지명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비문의 영락 10년에 호태왕이 친정한 기사에는 탁순(卓淳), 담로(路島), 난파(難波), 무장(武藏), 축사(竺斯) 등의 지명들이 새겨져 있다.

 

속리산 등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언급된 지명들은 대부분 <삼국사기>지리지에 한반도 남부에 있는 지명으로 비정되어 있고, 비문에 새겨진 지명들은 분명히 현재 일본 본토에 있다는 지명들이다. 그렇다면 호태왕은 한반도 남부를 공격한 것인지 일본 본토를 공격한 것인지 분명히 해야 될 필요가 있는데, 필자는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언급된 지명들이 잘못된 것으로 본다. 왜 그렇게 추정하는지 그 이유를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도록 하겠다.

 

<환단고기>가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사연

 

자주적인 민족사관 확립을 위해 1968년 사재까지 털어가며 월간지 <자유>를 발행했으며, 안호상 박사등과 함께 국사찾기운동을 벌인 박창암 장군(예비역 준장)은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가지고 있던 <환단고기> 원본을 책으로 출간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당시 국내에서는 출판사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마침 일본인 변호사이며 재야사학자인 가지마 노보루(鹿島 昇)가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기에 호텔로 찾아가서는 일본에서라도 출간이 가능한지 여부를 타진했다. 며칠 뒤 가지마 노보루는 박창암 장군에게 책을 돌려주며 일본에 돌아가서 출간 가능 여부를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가지마노보루는 복사해온 책의 내용에다가 자신이 해설을 붙여 일본에서 일본어로 <桓檀古記>라는 책을 출간했다. 박창암 장군이 가지마 노보루에게 완전 농락당한 것이었다.

 

▲ 1982년 가지마 노보루에 의해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일본어판 환단고기     © 편집부

 

한편 의정부에서 기거하던 이유립은 매사가 마음대로 잘 진행되지 않자 부인이 있는 대전으로 내려갔다가 한참 만에 의정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주인이 이유립의 짐을 다 싸놓고 있었다. 이유립이 내 책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세도 한참 밀려 있는데다가 간다온다 말도 없이 방을 오랫동안 비어두었기에 당신이 도망간 줄 알고 그 책을 고물상에게 팔아 방세를 보충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     ©편집부

이렇게 해서 이유립이 가지고 있던 <환단고기> 원본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고, 일본에서 가지마 노보루가 출간한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나중에 한국으로 가져와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간하는 넌센스가 벌어졌던 것이다. 원본이 유실되고 말았으니 우리로서는 일본어판 <桓檀古記>의 내용이 맞는지 틀리는지 점검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 가지마노보루가 일본판 <桓檀古記>를 출간할 때 위 호태왕 관련 지명을 한반도 남부에 있는 지명으로 고치지 않았나 싶다. 그래야 한반도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즉 당시 호태왕이 한반도 남부에 있는 왜의 임나를 공격해 격파한 것이라는 궤변을 조작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아마 비문에 새겨진 지명들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며, 현재 일본열도에 비정되어 있는 탁순(卓淳), 담로(路島), 난파(難波), 무장(武藏), 축사(竺斯) 등의 지명들도 분명 당시 대륙에 존재했던 지명들일 것이다. 여하튼 비문에 새겨진 호태왕의 쾌거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일어난 역사라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기사입력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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