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 광개토호태왕에게 사찰 받은 인덕왜왕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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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 컬럼니스트 2019-01-30

 

호태왕비문에 새겨진 영락 14(404) 기사는 다음과 같다.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自石城島連船□□□□□□□□□平穰踵躡倭寇相遇王盪㓨倭寇潰敗斬殺無數. (14(404) 갑진에 왜가 법도에 어긋나게 대방의 경계를 침입해왔다. □□□□ 석성도로부터 배를 연결하여 □□□□□□□□□ 평양을 왜구의 자취를 밟아 서로 만나게 되자 왕의 깃발을 끊고 쓸어버리니 왜구가 무너져 패했는데, 참살자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로 해석된다.

 

위 문구에서 는 깨어져버려 잘 안 보이는 글자들인데, 이 글자들을 없앤 자는 과연 누구일까? 비문에 “~~倭不軌侵入帶方界(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계에 침입하여)”라는 문구가 있어 왜와 관련된 기사임이 분명하므로 일본이 자신들의 수치를 지우기 위해 비문을 훼손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문정창 선생 등은 왜의 대방계 침입에 대한 기사도 일제의 왜곡으로 보았다

.

16개 해석문을 서로 검토해본 결과 일본측 학자들을 포함하여 절반 가까이가 를 읽지 못했기에, 가장 원문에 가까울 것으로 보이는 해석은 아래 이유립설과 이덕수설로 압축되어진다.

 

(이유립설)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王率水軍自石城島連船結陳以制海將戍守平穰踵躡倭寇相遇王盪㓨倭寇潰敗斬殺無數

(해석)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계에 침입해오자 왕께서 수군을 거느리고 석성도로부터 배를 연결하여 대형을 갖추어 바다 길을 지배하는 한편 장수를 보내 평양을 굳게 지키게 하시며 왜구의 자취를 밟아 서로 만나게 되자 왕 친위대의 깃발을 끊고 쓸어버리니 왜구가 무너져 패했는데, 참살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이덕수설)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焚掠邊民自石城島連船蔽海大至王聞之怒遣平壤軍直欲戰相遇王盪㓨倭寇潰敗斬殺無數

(해석)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계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변두리 백성들을 약탈하는데, 석성도로부터 배를 연결하여 바다를 크게 막는 데까지 이르자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평양군을 파견하여 바로 싸우게 했다. 서로 만나 왕 특수부대가가운데를 끊고 쓸어 죽이니 왜구가 무너져 패했는데, 참살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위  두 해석문 중  어느  게  더  타당성이  있는 지를  <고구리사초략> 기록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영락  14(404)  갑진  5, 이  때  왜구가  대방에  쳐들어왔기에  붕련에게  군사를  움직여  왜선을  공격하게  했더니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라는  문구가  있어  호태왕이  직접  친정을  하지  않고  장수를  보내  왜구를  토벌했으므로  王率水軍(왕이 수군을 인솔해)으로 본 이유립의 해석보다는 焚掠邊民(불을 지르고 변두리 백성들을 약탈하는데)으로 본 이덕수의 해석이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王健群

박시형

今西龍

水谷悌二郞

會餘錄

 

 

 

 

 

莜峰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

石城

連船

王躬率往討從平穰□□□相遇王盪㓨倭寇潰敗斬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相遇王刺倭寇潰敗斬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相遇王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훈(김소발3).bmp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9pixel, 세로 39pixel 刺倭寇潰敗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相遇王刺倭寇潰敗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僕勾□□□□相遇王憧要倭潰取斬煞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僕公□□□□憧要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連船

平穰□□□相遇王刺倭寇潰敗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鋒相遇王刺倭寇潰敗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

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相遇王刺倭寇潰敗斬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太王率兵自石城島運渡海迅抵帶方倭退追至滿城然後相遇王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훈(김소발3).bmp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9pixel, 세로 39pixel 盪㓨倭寇潰敗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王率水軍自石城島連船結陳以制海遣將戍守平穰踵躡倭寇相遇王盪㓨倭寇潰敗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焚掠邊民自石城島連船蔽大至王聞之怒遣平穰軍直欲戰相遇王盪㓨倭寇潰敗斬殺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太王率兵自石城島運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10f80017.pn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8pixel, 세로 20pixel 渡海迅抵帶方倭退追至勾滿城然後相遇王慬自蕆盪㓨殺倭潰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太王率兵自石城島運航渡海迅抵帶方倭退追至滿城然後相遇王懂自藏盪㓨殺倭潰敗斬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太王率兵自石城島運航渡海迅抵帶方倭退追至勾滿城然後相遇王盪㓨殺倭潰敗斬無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太王率兵自石城島運航渡海迅抵帶方倭退追至勾滿城然後相遇王憧要裁盪㓨殺倭潰敗斬殺無數

                                            <비문의 영락 14년 기사에 대한 16개 해석문 비교표>

 

왜와 왜구의 차이

 

14(404) 비문에서 가장 큰 의문은 영락 10(400)에 호태왕에게 국가적으로 항복해 군국(식민지)이 되었던 왜가 불과 4년 만에 어떻게 고구려 땅인 대방의 경계에 쳐들어올 수 있었는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아무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 비문에는 왜()로 언급되었다가 위에서는 왜 왜구(倭寇)라는 표현을 썼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정답을 <고구리사초략>에서 찾을 수 있다. “14(404) 갑진 5, 이때 왜구가 대방에 쳐들어왔기에 붕련에게 군사를 움직여 왜선을 공격하게 했더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들은 해적무리들이었으며, 인덕이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인덕은 사신을 보내 사죄했고, 상은 서구를 왜의 땅으로 보내어 그 진상을 알아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영락 14년 대방에 쳐들어온 왜구는 왜의 정규군이 아니라 바로 정부의 통제를 안 받는 해적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5(405) 을사 4, 보금(宝金)이 독산(獨山)에서 왜구(倭寇) 3백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지난해 쳐들어왔던 왜의 잔적이었다.왜 땅엔 큰 섬들이 많고 서로들 다른 무리들이어서 인덕(仁德)의 교화가 두루 미치지 못하였음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하였다. 7, 서구(胥狗)가 왜에서 돌아와 왜의 풍습과 산천 및 물길에 대하여 아뢰었다.”라는 기록에서 영락 14년에 쳐들어온 왜구는 그야말로 해적떼였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구려 관리가 왜국에 들어가 왜구 침략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했으며, 일 년 가까이 왜국의 지리에 대해 조사까지 했다는 것은 왜왕 인덕이 고구리 호태왕의 군국(식민지) 제후가 아니라면 과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영락 10년 왜가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가 이에 불복하고는 다시 도발했다가 결국은 군국(식민지)이 되었다는 결자징실의 해석은 옳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명나라에서 그린 왜국의 그림     © 편집부

  

120년이 부풀려진 <일본서기>

 

<일본서기>에는 신공왕후가 69년간 섭정을 했고, 뒤를 이어 응신왕이 41년간 재위하다가, 그 뒤를 인덕왕이 87년간 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러한 재위기간이 맞는지 <일본서기>에 언급된 백제왕의 등극시기와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신공왕후 55년에 백제 근초고왕 죽음 (375), 64년에 근구수왕 죽음 (384), 65년에 침류왕 죽음 (385) 등이 정확히 일치하므로, 389년은 신공왕후가 죽은 해이며 응신이 왜왕이 된 해가 확실해 보인다.  

 

▲ <일본서기>로는 이런 계보가 성립되지 않는다  ©

또한 응신 3년에 백제 아신왕 즉위 (392), 16년에 아신왕 죽음 (405) 이후 응신이 25년을 더 재위하다 430년에 응신이 죽고 인덕왕이 즉위해 87년간 재위에 있었다면 517년까지가 인덕왕 재위기간이다. 이후 17세의 6, 18세의 5, 19세의 42, 20세의 3년 이후 573년에 21세 웅략왕이 즉위한다. 웅략 20년에 백제의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처형을 당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일본서기>의 년도로는 593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개로왕의 죽은 해는 475년이다. 따라서 약 120년의 허구가 더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고구리 호태왕과 백제 아신왕과 왜의 응신왕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보위에 오른다. 그러다가 호태왕 10(400)에 왜가 고구리에게 국가적으로 항복했다가 군국(식민지나라)이 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왜왕이 응신에서 인덕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고구리사초략> 영락 14년 기록에 인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신왕은 41년이 아니라 11년간 재위했던 것이다. 여하튼 <일본서기> 120년 부풀리기의 시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응신왕의 30년은 역사왜곡을 위해 부풀려진 것이 확실하다 할 수 있다

기사입력 :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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